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5:1~9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세월호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를 물어 왔습니다. 특히 저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 날 무렵까지 3년 동안 안산시에서 살아 왔었기 때문에 성도들로부터 ‘하나님은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사랑 하는가“라는 질문을 들어왔습니다.
청년 실업이 계속되는 요즘에 기독 청년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도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가? 어쩌면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더 잘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지에 대한 물음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 국정 논란의 사태로 인하여 온 나라가 온 통 뒤집어 져서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또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에 대해 침묵하시는가?’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라고요.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더 커져 갔습니다.
약2600년 전에, 선지자 하박국도 신음과 탄식으로 동일한 질문을 하나님께 던졌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라고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있습니까?’ 라고 따질 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2:4) 하나님이 온 열방과 역사의 주인이시고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의 고난 앞에서 상황을 탓하기 보다는 알고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 ‘믿음’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바울이 풀이를 해 줍니다.이 믿음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말씀하십니다.”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바울은 우리에 부활의 믿음을 가질 것을 당부합니다. 바울이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세상에서 어리석게 보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전한 것은 자기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마치 미친 사람처럼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모든 것을 바꿉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옛 생명을 죽이고 부활은 새 생명을 가져 다 줍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절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하며 하늘나라를 사모합니다. 8절에서도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하여 보이는 이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간절히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없습니다. 삶과 죽음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의 어느 편에 속하느냐 기보다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5장 9절에서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0에서도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함이라’ 과 같은 맥락입니다. 보통 삶과 죽음은 엄청나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은 자에게 매우 비통함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는 그리스도와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었습니다. 죽음을 넘어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허무하고 원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것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0~2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바울은 이 세상에 사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함께 있고 싶은 소망이 더 컸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바울이 죽음의 고난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은 그 끝이 육신의 멈을 벗고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기쁘시게 하고 존귀케 하는 열망입니다.
용사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고난을 당하고, 낙심하고, 근심하며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삶에 대한 용기를 잃어버리고 의욕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달라고 탄원했습니다. 대한민국 청년 실업자들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기독 청년 실업자들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의문을 던 질수 있습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신음과 탄식으로 질문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원망의 말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모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여 주님을 위하여 열정적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그 시간들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주님을 존귀케 하기 위하여 자신을 드렸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활의 소망 때문에 죽음을 사모하고 열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뒤에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모든 상황 속에서 유일한 대답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부활의 믿음과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부활의 믿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5장 15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정의’ 와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서 살아가는 불신자들에게 이 부활의 복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이 일이 우리들의 직분입니다.
그리고 이 직분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잠잠히 인내하며 기다려 봅시다.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완전하시다는 것을. 천국에 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곳은 온전한 지식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의 이유를 알지 못하여 답답하여 신음하고 탄식합니까? 그곳에 가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예수님께 물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가면 완전한 지식으로 모든 일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하신 주님의 사랑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주제별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사의 태도 (1) | 2021.01.24 |
---|---|
우리가 맺어야 할 관계들 (0) | 2021.01.23 |
선한 사마리아인 (0) | 2021.01.10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0) | 2021.01.06 |
실로암 (0) | 2021.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