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실로암 사건 2018년 6월 24일
성경 봉독: 요한복음 9:1~11 (새번역)
1.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3.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4.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7.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8.이웃 사람들과, 그가 전에 거지인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냐?" 하였다.
9.다른 사람들 가운데는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또 더러는 "그가 아니라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10.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11.그가 대답하였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소.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소."
우리 용사들이 훈련병 시절에 훈련소 교회에서 가장 많이 부른 찬송은 방금 부른 '실로암'입니다.
본문 성경의 내용의 결론을 알려면 9장부터 10장 까지를 읽어야합니다.
이해를 더 잘하기 위하여 우리가 “실로암 사건”을 함께 파헤쳐 보기로 합시다. 여러분이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 속으로 들어 가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로써 예수님 옆에 바짝 붙어서 모든 상황을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등장인물: 예수님, 제자들, 맹인, 맹인의 부모, 이웃 사람들, 유대인(바리새인)
언제: 안식일
장소: 실로암 근처
유대인들에게 쫓겨서 예수님이 성전을 나와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성전의 위치, 실로암의 위치를 보여주며)
예루살렘에는 2개의 커다란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타 연못과 실로암 연못 (예루살렘 남쪽, 19m x 6m) 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침을 뱉어 진흙을 개서 맹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 사회와 문화를 모르면 우리는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예수님이 더러운 침을” “아니 또 지저분한 진흙을 눈에”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에 랍비들이 안식일에 금하고 있던, 성경에도 없는 39개조항 중 몇 가지를 위반하고 계십니다.
진흙을 개신 것은 “안식일에 반죽을 하지 말라”는 조항을 어기고 있습니다.
침을 개어 진흙을 눈에 바른 것은 “안식일에 침을 바르지 말라”는 조항을 위반하고 계십니다. 랍비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법으로 예수님을 흠잡았습니다. 내가 예수님 곁에 있다면 “아니 예수님, 어찌 시려고 유대인들이 보고 있는데…” 이런 걱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에 이 일을 행하신 것은 옳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고 또 변질되어 버린 유대인들과 충돌하고 싶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맹인은 이 말도 안되는 황당한 말을 듣고, 가서 씻어야 합니까? 아니면 거부해야 합니까? 가서 씻어야 되는지? 말아야 하는지? 평생동안 맹인으로 살아야 왔는 데, 말이 되는가? 할까 말까? 어쩌면 작은 결정일 수도 있습니다. 가벼운 결정일 수 있습니다. 에이 해 보지 뭐 이렇게요. 에이 싫어요. 실로암에 안갈래요. 어쩌면 쉽게 결정을 할 수가 있죠.
예수님이 맹인에게 “실로암으로 가서 씻어라”라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가서 씻을까 말까?” 작은 결정입니다. 가볍게 결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경 속에서 예수님의 곁에 있어서 이렇게 말해 주고 싶을 것입니다. “빨리 가서 씻어. 얼마전에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도 일어 났어” 요한복음 5장에서 제자들은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는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우리 병사들은 주일에 되면 생활관에서 쉬고 싶을 것입니다. 교회에 갈까 말까, 그냥 쉴까?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결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데 “믿을까 말까”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낸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이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데 여러분은 문을 열어 줄 수도 있고 안 열어 줄 수도 있습니다. 문을 열러 주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입니까?
구걸하던 맹인은 눈을 뜨고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33절에서 예수님 그 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 그 분은 메시아,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유대인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39절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육체적으로 정상이지만 장애인과 같다. 영적으로 앞을 못 보는 시각 장애인이다. 영적 소경이다.”
실로안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눈을 뜨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직 영적 소경인 용사들이 있습니까?
요한 복음 10장에서는 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양무리의 목자이지요. 양은 앞을 멀리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양과 같다는 것입니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목자이신 예수님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요한 복음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병사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거부하겠습니까?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럼요, 예수님을 따라야지요. 따라야만 합니다. 이렇게 기도 합시다. 기도할 수도 있고 안 할 수 있습니다.
장병 여러분, 모두 눈을 감고 저를 따라 기도합니다.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기를 원합니다. 지금 내 마음에 들어와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의 주 예수님, 나는 죄인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주님으로 내 마음에 모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지금 제 마음에 들어와 주십시오. 나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 해결해 주신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시고 내게도 영생을 주옵소서. 이제 에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시며,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나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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