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산상수훈 - 너희도 온전하라

Paul KO 2020. 12. 29. 22:57

제목: 너희도 온전하라

본문: 마태복음 5:38~48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신분의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사고에도, 가치관에도, 정신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변화가 생깁니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예수님의 관점에서 바라봐야합니다.

 

우리는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들어 본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 끼리 한 대 맞으면 한대 다시 때리고, 너도 이렇게 했으니까 나도 이렇게 할래 하면서 어느 정도의 보복성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되갚아 주곤 했습니다. 장난이였을 경우도 있고, 또는 패싸움에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보복하라고 했어 하면서 자신을 합리화를 하곤 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후에 내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많은 성경 구절을 잘못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올바른 해석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랍비들은 율법 해석가인데 율법을 왜곡되게 해석하고, 교묘하게 해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게 하였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내 형제의 손을 잘랐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가서 상대방의 머리를 베어 버릴 것입니다. 최초의 폭력이 확대되어 상대방의 어떤 사람은 자신이 명예회복을 위하여 내 집을 폭파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서로 보복을 서로 하다 보면 이 싸움은 언제 끝날까요?

그런데 만일 싸움이 처음 폭력이 시작되었을 때와 같이 동일한 방법, 동일한 정도로 보복한다면 그것으로 끝이 날 수 있습니다. 구약 레위기 24:20에서는 이러한 방법을 보여 줍니다.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동해복수법(동일 보복 원리)인데 지나친 보복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해 놓은 규례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개인적으로 복수심에 사로 잡힌 사람들에 의하여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집행부에 의하여 실행되는 것입니다. 내가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는 보복이 가능하다고 해석하고 그렇게 해왔습니다.

여러분 이 율법이 정의를 실현하다고 봅니까? 정의보다는 원한, 보복, 악의, 미움만을 불러 일으키는 무기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복수는 계속 복수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사랑으로 그들을 감화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예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마라. 심한 모욕을 당했을 때 온유하게 받아드려라 라는 말입니다. (그 상대방은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에수님은 십자자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시는 도중에 군중들과 로마 군인들은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치며 희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줄 모릅니다.” 억울한 일 이 있을 때 내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두번째 예은 법정소송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세상의법정에 서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법적 권한을 포기하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번째 예는, 로마 군인들은 법적으로 사람들에게 사역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규정된 거리만큼 짐을 운반 시킬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하게 될 일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해주라는 것입니다. 부대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예는 나에게 부탁하고 요구되는 일이 있을 때, 내가 형편이 닿는 대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상술적으로, 이기적으로, 구두쇠적인 태도로 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리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1) 원수를 갚거나 보복할 권한이 없다. (5:39)

2) 소유에 대한 권한도 없다.(5:40)

3) 시간과 돈에 대한 권한도 없다.(5:41, 42)

4) 법적 권리조차도 때로는 포기할 필요가 있다. (5:40)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 개념이 아닙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길이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은 있지만 네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유대인들은 오직 이웃만을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해도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웃의 범위는 어디까지 입니까? 우리는 지난 달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배웠습니다. 이웃의 범위는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원수도 나의 이웃인 것입니다. 율법의 해석만으로도 그러므로 원수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미워할 수 있는 다른 핑계를 댑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분짜리 동영상을 하나 보고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교훈 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저희가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게 도와 주시고,

이웃을 사랑하는 저희가 되게 도우소서.